백화점의 판매직부터 하이 패션 하우스의 바이어까지, 전천후로 패션계의 다양한 면면을 경험한 후 한복 디자이너가 된 김영진. 맞춤 예복 차이(差異)의 기성복 라인인 차이 킴(Tchai Kim)의 옷은 그래서인지 동시대적인 코드를 유지하고 있다.
새침한 외모와 세련된 취향을 지녔지만 DNA만큼은 철저하게 한국적인 에스프리로 물들어 있는 디자이너 김영진을 만났다.

 

이전의 백그라운드가 궁금하다. 기성복과 럭셔리 브랜드에서 패션을 시작했다고 들었는데?

 

원래는 연극을 했었다. 우리 극을 하고 싶어서 연희단거리패, 우리극연구소에 있었다. 그전에는 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노름마치>(초야에 묻혀 있던 전통 예인들을 발굴하고 그들을 이끌어 무대에 세웠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책으로 기생, 무당, 광대, 한량 등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전통 예인들의 삶에 대한 다양한 사연들을 전해준다)라는 책을 썼던 진옥섭 선배를 따라 고성오광대니 봉산탈춤이니 하는 것들을 쫓아다니며 배웠다. 스무 살 무렵부터 방학에는 무형문화재 유산센터에 가서 김수현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우기도 했다. 아무도 그런 것들에 관심없을 시절과 나이였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 것이 좋았다. 그래서 그 문화 안에 무언가 있을 거다, 나의 DNA에도 그것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 극을 하다가 갑자기 패션계로 전향하게 되었다. 너무 다른분야 아닌가?

개인적인 이유로 연극을 그만두게 되면서 먹고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우연히 패션 업계로 흘러들어왔다. 지금은 없어진 해태그룹의 GV2 론칭 멤버로 참여했고 후에는 당시 코오롱에서 수입하던 브랜드 체루티 1881로 옮기게 되었는데, 바잉도 하고 판매도 하면서 브랜딩에 대한 모든 것을 관할했다. 그러다가 당시 체루티와 코오롱의 계약이 만료되면서 자연스럽게 루이 비통으로 이직하게 되었다. 신경숙의 <외딴 방>을 좋아하는, 말 그대로 외딴 섬에 혼자 살고 있다가 느닷없이 하이 패션을 경험하게 된 거다. 1990년대는 막 럭셔리 브랜드가 수입되고 한국에도 라이선스 매거진이 시작될 즈음이니 한창 재밌게 일했을 것 같은데 왜 패션계를 떠나게 되었나? 루이 비통에서는 바잉하고 미팅하고 그러다 보면 출장 일정이 보름을 넘길 때도 있었다. 한번은 그렇게 긴 출장을 다녀온 날이었는데 본사에서 레터가 잘못 와서 그걸 해결하러 그 다음 날 또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됐다. 원체 외국 음식을 잘 못 먹는 김치주의자라 얼굴에는 버짐이 피고 영양실조에 걸릴 지경이었는데 곧바로 또 출장을 떠나려니 너무 힘들더라. 그런 데다 남편도 그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그만두자 마음먹었다.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아내의 삶도 한번 살아보고 싶더라.

 

그런 삶이 본인에게 잘 맞던가?

 

6개월 정도 지나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내가 무능하게 느껴지면서 우울증이 생길 정도였으니. ‘나는 어디 간 거지?’ 하는 생각이 고작 6개월 만에 든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 집 앞에 퀼트집이 있었는데, 나 역시 원단을 만지던 사람인지라 그게 눈에 들어오더라. 낮이고 밤이고 퀼트를 했다. 근데 하다 보니 그것도 아닌 거 같았다. 정체성이 없으니까.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게 도대체 무엇일까 진지하게 생각해보니 예전부터 한복을 배우고 싶었던 게 생각나더라. 우리극연구소에 있을 때 <무너진 사랑 탑은> <홍도야, 울지 마라> 같은 악극을 많이 했는데 그땐 직접 한복도 만들고, 소품도 제작하고 그랬다. 그때 한복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런 분야는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배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른 뒤에서야 ‘취미로 하는데 뭐 어때’ 하는 마음으로 무형문화재 선생님을 찾아갔다. 다행히 그 선생님이 받아주셔서 일주일에 한 번씩, 취미처럼 한옥마을에서 선생님이 시연하실 때 옆에서 도와서 바느질도 하고 그랬다. 선생님이랑 이런저런 얘기 하면서, 배냇저고리부터 만들기 시작했는데 너무 좋더라.

막상 해보고 나니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

 

보통 한복은 장인의 작업이라고 여기지 않나. 그런데 한복을 배워보니 이 구조가 장인이 해서는 안 되는 시스템이더라. 패션브랜드에도 디자이너들이 일하는 디자인실이 있고, 장인들이 일하는 공방이 따로 있듯이 한복도 마찬가지다. 한복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와 만드는 장인과 소비자한테 상품을 설명하고 제시하는 세일즈 어드바이저까지, 삼권분립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우리나라에서 한복은 디자이너가 장인이 되어야 하고 브랜드도 알려야 하며 팔기도 해야 한다니 참 이상한 구조 아닌가?


그럼 차이의 시스템은 기존의 한복을 짓던 분들하고는 어떻게 다른가?

 

나는 내 공방을 두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잘 훈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공방의 선생님들보다 바느질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야 하고 계속 공부해야 한복의 그레이드를 높일 수 있다. 재미로 시작했는데 어떻게 브랜드로 발전하게 되었나? 한 번도 한복 집을 차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주변의 지인들이 하나둘씩 알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연희동 골목에 자그마하게 한복집을 냈다. 그때가 2003년인가, 2004년도였는데 한복계에서는 꽤 센세이셔널했다. 1층은 갤러리 공간으로 쓰고 지하는 모던한 노출 콘크리트로 인테리어를 해서 한복을 조그맣게 보여줬었다. 그땐 자신이 없어서.(웃음) 그리고 몇 년 후에 지금의 한남동 주택으로 이사오게 되었다. 1층은 아틀리에로 사용하고, 2층은 주거 공간이다.

맞춤식으로만 하는 한복은 한남동에서 짓고 있지만 삼청동의 매장은 차이 킴이라는 기성복 매장이다. 기성복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한복은 전통 복식에 기인했기 때문에 디자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복에 나의 크리에이티비티를 조금이라도 넣으면 사람들이 이게 무슨 전통 한복이냐고 말들이 많은데 그런 것도 듣기 싫었다.(웃음) 한복을 만드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시대에 맞는 나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 마치 손발이 묶인 기분이 들더라. 사실 이런 생각은 차이를 시작한 지 1~2년 만에 든 생각이었다. 원래 이 건물 지하에 꽃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조그맣게 판매하면서 테스팅을 해보고 유랑 매장 형식으로 차이 킴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라인의 중요한 아이덴티티가 노마드한 감성인데 그래서 마치 유랑하듯이 이 옷들의 팝업 스토어를 열고 있는 거다. 패션이라는 것이 물질적인데 이 옷은 그런 기준에서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어주는, 그래서 이 옷을 입었을때 더 인간적인 개체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했다.

다양한 커리어를 쌓아오다가 그것의 종착역이 차이와 차이 킴이라는 것도 신선한데, 여기에 당신의 자아와 경험이 디테일하게 흡수되어 있는 느낌이다.

 

처음 연극을 했을 당시에는 이렇게 디자이너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과정을 보면 다 인과관계가 있더라. 이를테면 연극을 했기 때문에 드라마에 대해 공부를 하고 캐릭터를 연구했는데 그러다 보니 손님이 와서 한복을 맞추려고 할 때 무슨 일을 하는지, 건강은 어떤지, 성격은 어떤지 물어본다. 다른 한복집에서는 안 물어보는 질문을 하니 황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캐릭터를 알아야 그 사람에 맞는 한복이 나온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잘 연구했을 때 만족도가 높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옷은 그 사람과 생활을 변화시킨다. 기성복을 입었던 당신도 지금 어떤 변화를 겪었나?

 

옛날에는 비비안 웨스트우드 같은 격한 곡선의 전위적인 스타일을 좋아했다. 하지만 내가 그녀를 좋아했던 건 그녀가 영국의 전통적인 요소를 연구하기 때문에 옷에 늘 클래식함이 더해졌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도 굉장히 해방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유머러스함까지 멋지다. 그녀가 피트되는 옷을 만든다면 내가 만드는 옷들은 굉장히 루스해 그냥 입고 자도 될 정도다. 그래서 차이 킴 옷 중에 가운처럼 생긴 옷은 방랑자, 유랑자 컨셉트로 어디서나 깔고 잘 수 있는 컨셉트로 만들어졌다. 리넨 소재라 막 빨아도 되고. 차이 킴 역시 한복에서 착안한 기성복이지만 마찬가지로 일종의 해방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었다. 나 역시 그런 옷을 만들고, 입으며 살아서인지 라이프스타일이 굉장히 여유로워졌고 건강도 굉장히 좋아졌다.

모든 옷이 루스한가? 그렇다면 다른 기성복이랑 믹스가 어렵지 않을까?


이렇게 루스한 옷은 평상시에 주로 입는 옷들이다. 차이 킴의 옷 중에 두세 가지 라인 정도 다른 실루엣이 있다. 이를테면 H라인 스커트에 16센치 당의를 걸치면 굉장히 포멀한 스커트 수트처럼 보이는 거다. 모직이나 트위드 소재로 만들어져서 피트되는 재킷 룩을 연출할 수 있는 아이템도 있다. 또, 럭셔리 브랜드에서 출시하는 크루즈 라인처럼 아일릿 소재나 프린트 소재로 만들어져서 리조트 룩처럼 입을 수 있는 피스도 소개한다. 여행지에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내가 어디에서 온 사람이고, 나의 진정한 정체성이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옷들이다. 그래서 차이 킴의 고객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해외에서 우리 옷을 입고 사진을 찍어서 블로그에 올리고 그러더라. 어떤 고객은 빈 오케스트라 음악회에 우리 옷을 입고 간 사진을 올렸는가 하면, 작년에는 DDP에서 열린 <장소의 정신> 오프닝에 샤넬 VIP가 우리 옷에 샤넬 트위드 재킷을 레이어링해서 입고 왔더라. 그 옷차림에서 진정한 지성과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발견했다.



패션계에서도 차이 킴의 옷을 좋아하는 사람을 여러 명 발견했다. 분명 마니아도 있을 텐데 차이 킴을 대표하는 스테디셀러 아이템은 무엇인가? 

 

약 5년 전에 만든 철릭 원피스가 대표적이다. 철릭 원피스뿐만 아니라 연안 김씨 저고리에서 요소를 따온 셔츠, 배자 라인도 꾸준히 인기가 많다. 이들은 원형을 계속 현대적으로 변형하는 실험 단계를 오랜 기간 거친 후 출시된다. 특히 철릭 원피스는 일할 때 빛을 발한다. 새해 첫날이나 설날 때 한복을 차려입고 일하기가 어디 쉽나. 그런데 거기에 심플한 앞치마 하나 두르면 명절 느낌도 나고 좋다.


패션쇼를 할 생각은 없는지? 이렇게 다른 한복이라면 쇼를 해도 재미있을것 같은데.

 

한복 하는 사람들은 맨날 호텔에서 똑같은 쇼를 하는데 나는 그게 견딜 수가 없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는 꼭 왕실 혼례, 궁중한복이 나오는데 너무 싫다. ‘드라마틱하게 만들 수 없을까?’ 해서 연극 연출하는 사람과 스타일리스트 서영희 선생님의 도움으로 파주에 있는 농장에서 쇼를 했었다. 한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빠져 있었던 내추럴한 가드닝과 농장을 컨셉트로 결혼식을 하는 것처럼 연출했다. 그녀의 시그너처인 파스텔 톤으로 꾸미고 공연도 하고 무용도 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쇼를 하면 확실히 내가 성장하는 게 느껴진다. 객관적으로 부족한 게 뭔지, 잘하고 있는 것이 뭔지 알게 되니까. 그렇지만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주로 지원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그때 계획을 세운다.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은 늘 갖고 있다.

 

차이 킴의 고객 연령층은 어떤가? 셔츠 같은 것은 예전 클래식한 캐롤리나
헤레나나 동양적인 디테일을 가미했던 예전 질 샌더 느낌도 있다.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데 대부분이 30~40대다. 차이 킴이 차이의 대중화된 라인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렇게 대중적이진 못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연령층이 많이 젊어진 것은 사실이다.


소재 선정도 궁금하다. 기성복 라인인 만큼 전통적인 소재만을 고집할 수
는 없을 것 같은데.

 

소재에 있어 굉장히 자유로운 편이다. 트위드나 울 소재도 쓰고. 하지만 무조건 천연 섬유를 고집한다. 또 하나 나만의 룰이 있는데 만약 트위드 재킷을 만들면, 꼭 안감으로는 갑사나 모본단 같은 전통 소재로 믹스 매치를 하는 것. 프랑스 레이스를 사용한다면 숙고사, 갑사, 노방을 세 겹으로 안에 덧대서 완성도를 낸다든지.


한복 디자이너로서 한복이 보편화되는 것을 원하나?

 

모든 사람들이 다 한복을 입고 다닌다고 상상해봐라. 너무 짜증날 것 같지 않나.(웃음) 우리 옷이 좋다고 세상 사람들이 다 입고 다닌다면 그 또한 끔찍할 것 같다. 그건 차이 킴이 유니클로가 되는 거니까. 문화혁명도 아니고 다양한 취향과 개성이 공존하는 거리를 꿈꾼다.


차이 킴의 2015년 계획은?

 

먼저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에서 2014년 버전의 컨템퍼러리 한복을 구매하고 싶다는 요청이 와서 세 착장을 보내주기로 했다. 소재랑 디자인도 굉장히 자유롭게 제안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또, 샤넬에서도 한복에 대해 참고할 만한 책이나 자료를 권해달라는 요청이 와서 여러 가지 리서치를 하고 있다. 브랜드가 더 잘되었으면 좋겠지만 매장을 늘리거나, 내가 유명해져서 시끄럽게 살고 싶지는 않다. 다만 매출이 많아지면 직원들 월급도 더 챙겨줄 수 있어서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직원들로 하여금 최고의 브랜드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고 있다는 프라이드를 갖게 하고 싶다. 또, 올해는 더 창의적인 디자인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에디터/ 곽새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