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이후 이렇게 일상에 한복이 나타난 적 없었다" 



한복 열풍. 열풍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말 그대로 한복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요즘 고궁이 있는 광화문·인사동 일대는 평일·주말 할 것 없이 한복 입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온라인상에서도 한복에 관한 이야기가 크게 늘었다.
江南通新이 SK플래닛과 공동으로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최근 2년간 한복과 관련된 온라인상의 정보를 살펴본 결과, 한복을 언급한 내용은 지난해 4월 기준으로 전년 1년 동안 96만 건에서 올해 4월까지 1년 동안 약 210만 건으로 늘었다.

그 내용도 달라졌다. 지난해 4월까지 온라인상의 한복에 대한 언급은 ‘신부’ ‘결혼’ ‘전통’ ‘맞춤’ 등 결혼과 관련된 내용이 많았는데 최근 1년 동안은 ‘(한복을) 입고’라는 말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 ‘사진’‘대여’‘치마’‘오늘’ 등이 거론됐다.
과거 한복이 결혼식 때 입는 옷이었다면 이제는 ‘오늘’‘입고’‘사진’ 찍는 옷이 됐다는 의미다.




하나. 한복 is 놀이


지난해 말까지 한복에 대한 버즈량(buzz·온라인상의 언급 횟수)은 설과 추석이 있는 2월 9월에만 잠깐씩 늘었고 다른 시기엔 큰 변동 없이 잠잠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부터 갑자기 버즈량이 증가하기 시작하더니 지금까지 예년 명절 때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데이터를 분석한 SK플래닛의 이응탁 부장은 “버즈량을 통해 지난해 12월부터 한복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인터넷을 사용하는 주 연령층이 10~20대라는 점을 고려하면 최근 젊은 세대에서 한복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젊은 세대에 한복 입기는 지켜야 할 ‘전통’이 아니다. 그저 즐기면 되는 재미있는 ‘놀이’가 됐다. 광화문과 고궁, 인사동·삼청동 일대에서 만난 한복 입은 10~20대들은 모두 한복 입는 게 즐겁고 사진을 찍고 찍히는 게 재미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복 입은 사진을 찍어 자신의 SNS에 올리는 것은 이들에게 매우 ‘트렌디’한 놀이였다.
지난 4일 광화문에 한복 투어를 나온 고양제일중 3학년 이효정·김현(15)양은 “중간고사 끝나고 기념할 만한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 사람들이 한복을 입고 궁에서 사진을 찍는 걸 인터넷에서 보고 하고 싶어서 나왔다”고 말했다. 이날 인사동에서 만난 김민선(16)양은 경기도 의왕시에서 친구 넷과 한복 투어를 왔다고 했다. “친구들이 SNS에 올린 사진을 보니 예뻐서 우리도 나왔다”는 김양은 직접 구입한 한복을 집에서부터 입고 왔다. 김양은 “한복을 사기 위해 몇 달치 용돈을 모아 인터넷에서 구입했다”고 말했다.
최근 인스타그램에는 ‘한복’이란 해시태그가 달린 게시물이 40만 건에 달한다.

‘한복스타그램’ ‘한복대여’ ‘한복체험’ ‘한복촬영’ ‘한복여행’ 등의 해시태그까지 합치면 50만 건이 넘는다. 게시물에 대한 반응도 뜨거워서 사진마다 수백 개의 ‘좋아요’가 달린다. 유튜브엔 ‘한복 메이크업’ 동영상이 올라오면 조회수가 1만을 넘는 경우가 흔하고 최대 25만까지 이른다.
한복 입기는 청소년만의 놀이는 아니다. 주부 이지연(36)씨 가족은 몇 년 전부터 명절마다 온 가족이 한복을 입고 모인다. 시부모님부터 이씨와 남편, 다섯 살배기 아들까지 5명이 모두 개량 한복을 입는다. 이씨는 “인사동에 갔다가 한복 입은 사람들을 보고 시부모님께 다 같이 한복을 입어보는 건 어떠냐고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하셨다”고 말했다. 서로 잘 어울리는 한복을 입기 위해 경북 안동에 사는 시부모님이 서울 인사동으로 와서 한복을 맞췄다. 이씨는 “한복을 온 가족이 다 입으니 다른 옷을 입었을 때보다 더 하나로 뭉쳐지는 것 같고, 소속감과 뿌리를 찾은 듯 뿌듯하다”고 했다.
갑자기 사람들이 한복 입기를 즐기게 된 이유는 뭘까. SK플래닛의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을 통해 10~50대 남녀 582명에게 한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한복에 대한 이미지를 물었을 때 ‘긍정적’이라고 답한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66%에 달했다. ‘매우 긍정적’이라고 답한 사람이 19%였으며, 30%는 ‘과거 부정적이었던 한복에 대한 이미지가 최근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답했다.
한복 입은 사람에 대한 이미지도 좋다. 일상생활에서 한복 입은 사람을 봤을 때 ‘개성있게 느껴진다’고 대답한 사람이 39%로 제일 많았고, ‘예쁘다’는 응답이 34%로 전체 응답자의 71%가 긍정적으로 봤다. ‘낯설다’거나 ‘이질감이 느껴진다’는 부정적인 응답은 16%에 불과했다.
과거 특별한 날 입는 옷이었던 한복은 이제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왔다. 조사에서 ‘언제 한복을 입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아직 명절이나 가족행사, 결혼식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가장 많았지만, ‘평상시에 입고 싶다’ ‘나들이 갈 때 입고 싶다’는 사람의 비중도 전체 응답자의 26%인 238명이었다. ‘한복을 사고 싶다’는 사람도 응답자의 33%를 기록했다.




둘. 한복 is 패션


한복은 더 이상 지켜져야 할 전통에 머무르지 않는다. 예술로, 패션으로, 문화로 변주되어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왔다.
지난해 세계적 패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동대문 DDP에서 연 샤넬 패션쇼엔 한복에서 영감을 받은 옷들이 런웨이를 채웠고 한복을 새로운 패션으로 주목했다.

 지난해 아이돌 수지와 ‘2NE1’의 씨엘은 한복 화보를 찍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화제가 됐다.
지난 4월 인사동에서 열린 한국화가 김현정(28)씨의 ‘내숭놀이공원’전은 전시 27일 동안 6만7402명의 관람객이 들었다. 일반 전시에 관람객이 1만 명만 넘어도 성공했다고 평가하는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흥행 성적이다. 그의 그림엔 속이 살짝 비치는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 여인이 등장한다. 그 여인은 거침없는 동작으로 한복 치맛자락을 날리며 배달 스쿠터를 타고 강남역 11번 출구에서 떡볶이를 먹는다. 어릴 때부터 한복을 좋아해 지금도 일주일에 세 번은 한복을 입고 생활하는 김 작가의 모습이 투영된 일종의 자화상이다.

2010년부터 열기 시작한 그의 전시에는 한복을 입은 관람객들이 많이 온다. 그의 작품을 보고 그림 속 장소에서 한복을 입고 똑같은 포즈를 취한 사진을 보내기도 한다. 김 작가는 “나도 한복을 입고 생활을 하고 있고 또 내 그림을 보러 오는 사람들도 자유롭게 한복을 입고 온다. 관람객들은 한복 그림을 보러 가니 한복을 입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요즘 젊은 세대는 한복을 패션으로 받아들인다. 한복을 교복으로 입는 민족사관고에는 요즘 선배 교복
을 물려받는 게 유행이다. 졸업생 이세은(19)씨는 “다들 한복 교복을 좋아하는데 학년별로 색이 다르게 나와 여러 색을 갖춘 ‘컬렉션’을 만들기위해 선배 교복을 물려받으려고 한다”고 전했다. 이 학교의 최관영 기획부교장은 “몇 년 전 교복을 양장화 하려고 했더니 학생들이 반대해 그대로 고수하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 텍사스 프로비던스 하이스쿨 11학년에 재학 중인 김현린(17)양은 지난 4월에 열린 학교 댄스파티에 한복을 입고 참석했다. 국내 한복 온라인 사이트에 주문해 텍사스 현지에서 배송받아 입었다. 김양의 어머니 김근희(45·압구정동)씨는 “원래 11학년은 짧은 미니 드레스를 주로 입는데 자기 체형에 맞는 드레스가 없다며 퓨전 한복 드레스를 보내달라고 파티 한 달 전부터 졸랐다. 결국 내가 예쁘다는 쇼핑몰에 주문 넣고 해외 배송을 부탁해 보냈다”고 말했다. 김씨는 또 “전에는 한국 전통의 날 행사에도 한복 잘 안 입었는데 이번에 보니 한복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복이 입기가 유행하면서 과거 ‘개량 한복’이라고 불리던 변형된 생활 한복은 최근엔 ‘퓨전 생활 한복’ ‘패션 한복’으로 이름이 바꾸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몸에 딱 맞는 저고리는 마치 시스루처럼 속이 비치는 얇은 리넨이나 면, 작은 꽃무늬가 있는 원단으로 만든다. 저고리 길이도 활동하기 편하게 길어졌다. 치마는 가슴이 아닌 허리에 감아 입고 길이도 발목 위로 짧아졌다. 소재도 비단이나 합성섬유 대신 양장에 사용하는 다양한 패턴의 면이나 양모, 레이스 등을 사용해 색다른 느낌이 난다. 한복 쇼핑몰 ‘손짱’의 황이슬 대표는 “지금의 한복은 편의성에 스타일이 가미돼 새로운 스타일의 색다른 옷이 됐다”며 “종전에 예복으로만 여겨지던 한복이 지금은 패션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무관의 옷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철릭 원피스’와 영국 리버티 원단으로 만든 꽃무늬의 ‘리버티 한복’, 치마를 허리에 둘러 입는 ‘허리치마’도 인기다. 전통 한복보다는 현대적인 감각이 많이 가미됐고, 발랄한 느낌이 난다. 이 중 철릭 원피스와 리버티 한복은 영화 ‘해어화’ ‘조선마술사’ 등에서 색다른 한복으로 선보였던 한복 디자이너 김영진(왼쪽 사진)이 내놓으며 인기를 얻었다.
패션 한복을 사 입는 사람도 늘었다. G마켓은 지난달 사이트 내에 10~20대 여성을 타깃으로 ‘패션·캐주얼 한복’ 카테고리를 신설했다. 이나영 G마켓 한복매니저는 “지난해 초부터 한복 매출이 오르기 시작해 지난해 매출이 전년 대비 23% 성장했다”며 “사람들이 2년 전만 해도 전통 한복을 대여해 입었지만
지금은 저렴한 가격에 캐주얼하고 세련된 디자인의 생활 한복을 직접 사서 입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말했다. 처음 한복 사업을 시작한 2007년 한 달 매출이 20만~30만원에 불과했던 손짱은 지난해 15억에 매출을 올렸다.




셋. 한복 is 개성


“개화기 이후 이렇게 한복이 일상생활에서 나타난 적은 없었다.”
한국문화대탐사를 쓴 소설가 김종록 문화국가연구소 소장은 최근의 한복유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개화기 이후 신여성과 모던보이가 등장하면서 한복은 청산되어야 할 과거의 것, 양장은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것이라는 인식에 한복은 점점 사라졌다.
1950년대까지도 한복을 입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한복에 대한 인식은 오래되고 낡은 전통 복식에 불과했다. 한복은 점점 일상생활에서 멀어졌다.
그러던 한복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들어서다. 2011년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연 ‘한복 페스티발’에서 1900~50년대 근대 한복을 주제로 연 패션쇼가 그 시발점이 됐다. 최정철 한복진흥센터장은 “당시 박선옥·조진우·유영진·김영진등 젊은 한복 디자이너 중심으로 한복을 재해석한 패션쇼를 열었는데 그중 김영진 디자이너의 한복이 큰 호응을 얻었다”고 전했다.
김영진 디자이너가 이때 선보인 한복이 영국 리버티 원단(잔 꽃무늬가 들어간 면직물)을 사용한 저고리에 짤막한 길이의 치마였다. 최 센터장은 “김 디자이너의 한복으로 소재를 달리해도 한복이 예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며 “2013년부터는 젊은이들 사이에 리버티 한복이 유행했다”고 말했다. 이 한복을 가지고 만든 브랜드가 바로 ‘차이킴’이다. 김영진 디자이너는 “한복을 레디투웨어(기성복)으로 만들고 싶어서 전통 한복 브랜드 ‘차이 김영진’ 외에 일상에서도 입을 수 있는 세컨드 브랜드 ‘차이킴’을 만들었다”고 설명했
다.

손짱의 황 대표도 2014년 ‘리슬’이란 캐주얼 한복 브랜드를 만들었다. 황 대표는 “2011년 처음 선보였을 땐 별 인기가 없었는데, 2014년에 다시 내놓았을 땐 많은 사람이 좋아했다”고 말했다.
때마침 등장한 한복 여행가 권미루(36)씨도 한복 입기에 불을 지폈다. 권씨는 2014년부터 한복 입고 이탈리아·스페인·네팔 등지를 다닌 여행기를 자신의 블로그와 인스타그램에 올려 인기를 얻었다. 이후 그와 유사한 한복 여행기와 국내·외를 여행하는 한복 여행가들의 커뮤니티가 속속 생겼다. 인사동 한복집 ‘가람한복’의 정혜숙 대표는 “권씨가 유명진 후 많은 청소년이 인사동 한복 체험에 나서기 시작했다”며 “지난해 봄부터 한복 체험을 하려는 아이들로 인사동이 북적인다”고 말했다.
지금의 한복 입기는 전통 복식으로 엄격한 격식을 갖추는 게 아닌, 예쁜 옷을 입고 즐기고 자랑하는 놀이다. 권미루씨도 “만약 한복 입는 행위를 애국적이거나 캠페인적인 면에서 보려 했다면 결코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지금 젊은 세대의 한복 놀이 문화는 전통이라는 경직된 울타리가 아닌 즐거움과 재미라는 기준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복 입기 열풍에 대해 디자인 평론가 최범씨는 “드라마 ‘궁’ ‘성균관 스캔들’과 영화‘스캔들’ 등 퓨전 사극을 보고 자란 지금의 젊은 세대는 한복이 화려하고 예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복을 입어보고 싶어 하고, 이 모습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을 재밌어한다”는 것이다. 김종록 소장은 “한복이야말로 시선을 끌 수 있는 최고의 옷”이라고 설명했다. 한복이 자신을 돋보이게 만든 패션 아이템이자 SNS에서 자랑할 수 있는 수단이 됐다는 얘기다.

김영진 디자이너는 “지금의 한복은 명품백이 가지는 의미와 비슷하다”며 “다른 사람이 예쁘게 입은 한복을 보면 ‘나도 입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게 한다”고 했다.
김 소장은 “짧은 시간에 근대화를 이루면서 서구 문화만을 좇던 한국인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되면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고 ‘나’를 설명하는 하나의 도구로 한복이 부각됐다는 것이다. 조희숙 무형문화유산센터장은 “80년대 해외여행 자유화로 외국 경험이 늘면서 ‘우리나라’에 대해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한복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한복에 대한 관심은 자신을 설명할 뿌리, 곧 정체성을 찾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kimkr8486@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