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의 콜라보레이션

패션으로 현재 하는 한복,
오래됨을 담고 새로움을 짓다

한복디자이너 김영진

글. 성혜경 사진. 김병구​


 

​탈춤과 풍물을 배우며 연출가를 꿈꾸는 연희단거리패의 단원, 명품 패션브랜드인 체루티와 루이비통에서 바잉buying을 맡은 의류팀장, 미술관의 아트컨설턴트, 현대적인 감각의 한복을 만드는 디자이너이자 회사의 경영자까지.
김영진의 이력을 듣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 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게 신기했다.
사실 어느 것 하나 그녀 스스로 의도한 것은 없었다. 그 과정을 돌이켜보면 우연과 필연이 절묘하게 얽혀있는 실타래가 그녀를 이끌어준 듯 하다.


…한복디자이너가 되기까지
 “원래는 연극연출을 하려고 했었어요. 한복이나 디자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죠.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모든 경험들이 연결된것 같아요. 배고픈 극단 생활을 하던 시절엔 당연히 의상을 직접 만들어야 했고, 패션 브랜드의 바잉 업무를 하면서 자연히 디자인 감각이 생겼죠.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두고 취미로 한복을 배웠는데 그게 결정적인 계기가 됐죠.”

 

 오픈 3주년 행사가 있던 날 매장에서 만난 김영진은 분주한 상황임에도 침착한 표정과 차분한 말씨로 첫 마디를 시작했다. 경력이 독특한데 어쩌다 한복디자인을 하게 됐느냐는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긍이 갔다. 무대의상, 무대미술 등 연극연출을 하는데 필요한 감성이나 패션브랜드의 다양한 업무를 하면서 보고 듣는 것들, 모두다 결국은 미적 감각과 연결되어 있으니 말이다.

 “애초에 패션디자인부터 시작했다면 아마 중간에 그만뒀을 거예요.실무만큼 제대로 공부하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해요. 전 운 좋게도 바잉이라는 일을 하면서 실무를 익혔고 감각도 키웠죠.”

 한복을 하게 된 계기는 전통을 이어가겠다는‘큰 뜻’같은 게 아니었다.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연극을 포기한 뒤 우연한 기회에 패션브랜드에 취직했던 것이다. 그런데 해외 명품 패션브랜드의 바잉 업무를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우리나라엔 이렇게 자부심 높고 조직적으로 일하는 패션브랜드가 없을까, 라는 질문이었다. 동시에 과연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질문은 질문으로 끝나버릴 수도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한복제작을 배우면서 답을 찾았다. 감상하는것이 아닌 아름답게 입는 한복을 만들어보자, 그렇게 김영진에게 한복디자이너의 길이 시작됐다.​

​…현재의 패션인 한복
 “고려시대부터 문무백관들이 입던 관복을 철릭이라고 하는데, 그걸 응용해서 원피스를 만들어봤어요. 철릭 위에 허리치마를 두른 거죠. 특히 요선철릭은 주름이 있어 활동하기 편한데다, 허리가 강조되기 때문에 여성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김영진의 한복은 ‘오트쿠튀르haute couture’ 와 ‘레디 투 웨어ready to wear’ 로 나뉜다. 전자는 모든 고객에 맞춰 단속곳부터 치마와 저고리까지 하나하나 수제작으로 만드는 한복이고, 후자는 누구나 일상적으로 쉽게 입을 수있는 조금 더 편하고 현대적인 패션한복이다. 철릭을 접목한 원피스가 바로 그 런 레디 투 웨어다.

 “원래 한복은 패션이었어요. 지역마다, 집안마다 개성이 있었고 17세기, 18세기, 19세기…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해왔죠. 그런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그흐름이 단절돼 버렸어요. ‘ 전통한복’,‘ 개량한복’으로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복도 요즘 옷들처럼 트렌드가 있고 변하는 게 당연하잖아요.”

 

 한국인에게 한복은 전통문화의 상징과도 같다. 모두들 한복이 우리민족의 정서와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한복에 대한 친근함과 자부심 뒤에는 ‘옛것’이라는 상반된 인식이 내재해 있다. 한복이 단절되지 않고 계속 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2015년에 입을 수 있는 한복, 동시대적 옷을 만들고 즐겨야 한다는 것이 김영진 대표가 말하는 전통이다. 그것은 사라진 한복의 개성을 다시 살려내는 일과도 연결돼있다. 물론 고증과 추론이 전제돼야 한다. 예를 들어 연안 김씨 묘에서 출토된 한복 저고리를 분석해서 그 디자인이 계속 이어졌다면 어떻게 변했
을지 고증하고 추론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기모배래에 A라인 치마, 이걸 한복이라고 생각해요. 전 고정적인 이미지의 찍어놓은 것 같은 한복이 아닌 특별한 한복을 만들고 싶었어요.”

 단아한 한복도 있고 화려한 한복도 있다. 물론 단아하면서 동시에 화려한 디자인도 가능하다. 입는 사람에 따라, 때와 ​장소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한복을 만들 수있다. 김영진이 만드는
한복은 소재와 디자인에 경계가 없다. 그녀는 고유의 한국적 정서를 간직한 한복을 시대에 맞게, 입는 사람에게 어울리게 재해석해 다양하게 한복을 짓는다. 패브릭도 우리 전통 소재에서부터 프랑스의 레이스까지 다양하게 활용하고, 때로는 남미국가의 민속의상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적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평면제단과 같은 한복의 고유한 특성, 기본원칙을 유지한다.

과제는 가치를 만들고 지속시키는 것
 과거를 들여다보는 고증과 새롭게 창조하는 디자인이라는 작업을 병행해야 하기에 한복디자인은 힘들다. 매일 매일이 전쟁이다.

“ 항상 어려워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죠. 새로운 콘셉트의 한복이기 때문에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나가는 게 쉽지 않아요. 제가 바라는 건 ‘지속’이예요. 제 디자인, 우리 브랜드가 수백 년 이어졌으면 해요. 정말 감각적인 한복브랜드를 만들어서 저희 직원들이 자랑스럽게 계속 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샤넬은 죽었지만 샤넬이라는 브랜드는 지금까지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처럼 우리 한복에서도 그렇게 널리 인정받는 브랜드가 나올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명품은 값이 비싸기 때문에 명품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정성과 철학이 담겨있으며 사람들이 그가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돈 많은 사람들이 입는 옷이 아니라 누구나 어
느 특별한 날에 입고 싶은옷, 그래서 오래도록 사랑받는 옷. 한복디자이너 김영진은 그런 한복을 짓고 싶다​.